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울(李?)

공(公)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울(?)이고 본관(本貫)은 덕수(德水)이다. 고조(高祖)는 이름이 양(揚)인데, 벼슬은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고 문학과 행실이 뛰어난 분으로 호(號)는 춘당(春塘)이시다. 증조(曾祖)는 이름이 명신(明晨)인데, 벼슬이 지돈령부사(知敦寧府使)로 강평(康平)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조(祖)는 이름이 추(抽)인데, 벼슬이 온양군사(溫陽郡事)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이름이 의석(宜碩)인데, 홍산현감 겸 병마절제사(鴻山縣監兼兵馬節制使)를 역임하시고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의금부사(司憲府大司憲兼同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시었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해주최씨(海州崔氏)로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만리(萬理)의 따님으로 명망 있는 가문이다.

1471년(성종2)에 4남 1녀 중 삼남(三男)으로 출생하였으니, 무과(武科)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 총(叢)과 주부(主簿) 진(?)이 형이고, 증 좌찬성(贈左贊成) 천(?.율곡의 조부)이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슬기가 뛰어났으며 자라면서 그 기국과 도량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웠다. 타고난 재주로 무예에 힘쓴 결과 26세 되던 1496년(연산2) 10월 9일 모화관(慕華館)에서 치러진 무과(武科)에 28인 중 한사람으로 급제하였다.

1498년(연산4) 1월 4일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시묘를 마친 후 관직에 나갔으나, 당시 연산군의 정치가 문란하여 1506년(연산12)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다.

1509년(중종4)4월 훈련원 습독관(訓練院習讀官), 내금위(內禁衛) 충순위(忠順衛)를 거치고 외직으로 나가 온성부사(穩城府使. 현 함경북도 온성 )에 보임하였다. 이곳은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군사적 요충지로 무과급제자 중에서 군과 백성을 잘 다스릴 만한 인물을 가려서 보내던 곳이다. 그러나 보임 중 한 인물(人物)이 여진족(女眞族)에게 사로잡히어 갔고,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하여 죄를 물었으나, 1517년 7월 문정왕후 (文定王后)왕비 책봉 시 국가 대 사면령(赦免令)으로 사유(赦宥)받았다.

이후 곤양군수(昆陽郡守. 현 경상남도 사천 )를 거쳐 부평부사(富平府使. 현 인천 계양 )에 보임하였는데 이곳은 예전부터 마을이 잔폐(殘廢)하여 능력 있는 사람을 가려서 보내달라는 요청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곤양군수로 있을 때 직무를 이행하지 못하였다는 헌납 어영준(魚泳濬)과 지평 박훈(朴薰)의 탄핵으로 1518년(중종13) 8월 체직(遞職)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1519년(중종14) 길주목사(吉州牧使. 현 함경북도 길주 )에 부임하였다.

1522년(중종17)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 水軍節度使)로 승진하였고, 그 이듬해 1524년(중종19)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 水軍節度使)로 옮기었는데, 경상좌수사로 보임 시 아랫사람이 왜인(倭人)과 사사로이 매매(賣買)를 하다가 왜인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이를 숨겼다는 사헌부의 논박으로 1525년(중종20)1월 14일 파직되었다.

그 후 함경도 경성부사(鏡城府使. 함경북도 경성군 )에 부임하였는데, 1530년(중종25) 겨울, 경원진(慶源鎭. 세종 때 세워진 6鎭 중 한곳. 현 함경도 두만강 끝 )에서 통역을 맡아보던 통사(通事) 김은산(金銀山)이 여진족(女眞族) 우눌이(?訥耳)의 처소에서 칼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그를 잡아다 심문을 하다가 그만 타살케 하였고, 오랑캐를 함부로 죽였다는 관찰사 한형윤(韓亨允)의 치계로 이듬해 1531년(중종26) 10월 추고(推考)되었다.

돌아가신 해(1531년~1536년 사이)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숙부인 신천강씨께서 승정원(承政院)에 올린 상언(上言)날짜(1536년 10월)로 문헌을 고증할 뿐이다.

모년(某年)에 파주시 문산읍 선유리 산13-1번지(현 문산첨단산업단지내 공원)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성격이 충성되고 후덕하며, 의지가 굳세었다. 검소하고 강직하여 호화로움을 싫어하였고, 담백한 것을 좋아하였다. 벼슬하는데 있어서는 근신(勤愼)을 위주로 하였고 몸을 단속하는데 있어서는 정도(正道)를 가지고 하였으며 부모를 섬기는데 효성을 다하였으며 형제들과는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숙부인(淑夫人) 신천강씨(信川康氏. 水使公 諱 ? 配位)는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 강지연(康之淵)의 8世孫이다.

증조(曾祖)는 증 순충적덕보조공신 (贈純忠積德補祚功臣), 자헌대부 판도판서(版圖判書)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낸 강생경(康生敬)이고, 조부(祖父)는 사직(司直)을 지낸 강 면(康冕)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 강윤보(康允寶)인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장인(丈人)인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과는 8촌간이었다. 어머니 창원박씨(昌原朴氏)와의 2남 3녀 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신천강씨는 신천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원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곳의 토성으로서 크게 세를 떨치며 고려시대부터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거족이었다.v

수사공(水使公)에게 시집오셔서는 부군(夫君)을 도와 덕으로 자녀를 가르침에 시종 어김이 없으셨다. 종과 부리는 사람을 거느림에 있어서도 모두 법식이 있었고, 측실의 자식에게도 자기 소생과 다를 바 없이 지성으로 사랑하셨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경산현령(慶山縣令) 원근(元謹)인데 기장군수(機長郡守) 정희경(鄭熙慶)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1녀를 낳았으니, 손(孫)은 충무위 부사용(忠武衛副司勇) 증 좌승지(贈左承旨) 적(適),순천군수(順川郡守) 증 영의정(贈領議政) 덕풍군(德豊君) 통(通)이며 손녀는 찰방(察訪) 최준(崔濬)에게 출가하였다.

차남은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 원겸(元謙)인데 성종왕자(成宗王子) 완원군(完原君) 수(?)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으니, 손은 흡(洽), 윤(潤), 생원(生員) 숙(淑)이며, 손녀는 부장(部將) 이붕(李崩), 임팽검(任彭儉)에게 출가하였다.

삼남은 오위(五衛)부장(部將) 원순(元淳)인데 첨사(僉使) 이종광(李宗光)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으니 손은 수(遂), 봉(逢)이며 손녀는 판관(判官) 김응문(金應文)에게 출가하였다.

딸은 직장(直長) 조충준(曺忠俊)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1남 1녀를 두어 딸은 조진(曺縉)에게 출가하였으며, 아들원해(元諧)는 능성구씨(綾城具氏)경(璟)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두었으니, 손은 상(?), 호(琥), 현(玹), 탁(琢)이고, 손녀는 음성도정(陰城都正) 이유(李裕)에게 출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