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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공(議政公) 백천군수(白川郡守) 이경민(李景閔)
이경민(1578~1652)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字)는 여은(汝誾) 호(號)는 양촌(陽村)으로 인조 때의 문신이다.
1578년(선조11)3월 15일 순천군수(順川郡守) 증(贈) 영의정 덕풍군(德豊君) 통(通)과 정경부인 문화유씨 (시령부원군(始寧府院君) 영의정 전(?)의 딸)와의 오남 중 둘째로 출생하였으니, 사간원 정언 경안(景顔), 전라도관찰사 경용(景容), 병조참판 경헌(景憲), 이조판서 경증(景曾)이 그 형제이다.
본종봉사(本宗奉祀)로 백부(伯父) 이적(李 適 .증 좌승지)에게 출계(出系)하였다. 한참 공부할 시기(15세) 병란(임진왜란.1592)을 만나 학문을 배울 시기를 놓쳐 늦게 서야 공부를 배웠다.
1613년(광해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참봉(參奉)과 봉사(奉事)를 거쳐 1617년(광해9) 선공감 직장(繕工監直長)으로 승서하여 인왕산 아래 성첩(城堞)과 담장 밖 집짓는 공사를 감독하였다.
이듬해 1618년(광해10)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으로 옮겨 재임 시 인목대비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광주(廣州.현 성남시 고등동 등자리)로 낙향하여 한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얼마 후 외직으로 나가 현감(縣監)을 역임 중 부친상(1620년 5월)을 당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삼년 시묘를 마칠 무렵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 후 정사원종공신삼등(靖社原從功臣三等1625년)에 녹권 되었으나 청서(淸西)에 속하였던 까닭에 고사하였다. 이듬해 1624년(인조2)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부임해 나갔다. 당시 영남은 돈 많은 세력가들이 많아 재판이나 정책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그 때 예안유생 이유도(李有道) 형신(刑訊)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1626.5.). (이유도는 의성현에 유력자로서 부역을 거부하자 가두고 형신하다가 죽게 한 사건으로 이 사건은 그동안 중앙정치에서 서인(西人)에 의해 소외 되어왔던 영남 남인(南人) 의 반발을 불러와 서.남인 간의 정치적 갈등까지 불러일으켰었다.)
이듬해 정묘호란(1627.1)시 세자를 배종하여 전주로 내려가 있다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익위(翊衛)(1627.9.)에 임명되었고, 이듬해(1628.2.)용인현령(龍仁縣令)에 제수되어 임기를 마치었다.
잠시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로 있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1637.4.)와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1637.6.)을 거치고 승차하여 옥천군수(沃川郡守1637.7.)로 임명되었다. 부임하여서 당시 병자호란 후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에 힘쓰는 한편, 고향으로 내려와 있던 송시열(1607~1689)과 교류하며 율곡의 석담일기(경연일기)간행에 힘썼다. 군수임기를 마치고 차사원(差使員)으로 올라왔다가 곧바로 옥천현감(沃川縣監)에 제수되어 보임 중, 당시 청나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들을 쇄송(刷送.돌려보냄)하라는 명령을 즉시 행하지 않은 세 고을 중 한곳으로 지목되어 파직되었다. 얼마 후 1641년 7월 백천군수(白川郡守) 겸(兼) 해주진관병마절도사(海州鎭管 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백천군(白川郡)은 인물이 많고 행정이 번다하여 아무나 감당할 곳이 못되기 때문에 명망 있고 근실한 사람으로 골라 보내달라는 요청에 따른 것 이었다. 부임하여서는 여러 차례 내 외직을 역임한 경력을 바탕으로 지방 유력자들을 통솔하여 부역을 균등히 하고, 소송을 간명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고, 군정을 튼튼히 하여 지방관으로서 임무에 충실하여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군민들이 무척 아쉬워하였다.
문장과 글씨가 능하여 비문과 묘지명은 도맡아 하였고, 예전부터 집안 간에 가까이 지낸 청호 이일상(靑湖 李一相 :1612~1666)은 이경민의 문장이 매우 뛰어났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1652년 7월 9일에 돌아가시니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산37번지 덕수이씨 선영 남쪽 기슭에 장사지냈고, 누차 증직을 받아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종실(宗室) 전주이씨 영성군(永城君) 축(祝)의 딸이며, 이경민과 합장묘이다. 계배(繼配)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병절교위(秉節校尉) 하(河)의 딸이며, 정경부인에 봉해져 서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초배(初配)에 삼남이 있으니, 신천군수(信川郡守) 조(稠), 청산현감(靑山縣監) 암(?), 문과(文科) 승정원 좌승지 래(?) 이고, 후배(後配)에 팔남 일녀가 있으니 문과(文科) 형조참판 유(?), 화(和), 무과(武科)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빈(?), 무과(武科) 장연부사(長淵府使) 류(榴), 권(權), 시(稽), 칭(秤), 정(程)이요, 딸은 참봉 유장운(柳長運)에게 출가했다.
측실에 이남 일녀가 있으니 담(?), 자(?)요 딸은 신척(辛倜)에게 출가했다. 이렇듯 자녀가 13남 2녀로 그 소생이 매우 번창하였다. 이는 선친인 순천공 통(通)이 흡곡현령(?谷縣令) 재임 시 둘째아들이 자손이 번창 할 징험으로 거북이 비늘이 집 뜰을 편만하게 하는 꿈을 꾸었는데, 이것이 현실로 이어졌다며, 이경민의 비석을 세울 때 비대(碑臺)를 거북모양의 받침돌로 선조의 꿈에서 그 의미를 취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