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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世 이순신 ( 李舜臣 ) 충무공
545-1598( 인종 1- 선조 31) 조선의 무신 자는 여해 ( 汝諧 ) 시호 충무 ( 忠武 ). 28 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 ( 訓鍊院別科 ) 에 응시하였으나 불행히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 그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 년 뒤인 1576 년 ( 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 ( 權知訓鍊院奉事 ) 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 ( 董仇非堡權管 ) 에 보직되고 ,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 ( 鉢浦水軍萬戶 ) 를 거쳐 , 1583 년 건원보권관 ( 乾原堡權管 )· 훈련원참군 ( 訓鍊院參軍 ) 을 역임하고 , 1586 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 ( 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 ) 가 되었는데 , 이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중앙에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 ( 胡人 ) 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 ( 主將 ) 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 ( 添兵 ) 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 ( 定罪 )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 첫번째로 백의종군 ( 白衣從軍 ) 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
그뒤 전라도관찰사 이광 ( 李洸 ) 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 ( 助防將 )· 선전관 등이 되고 , 1589 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 ( 高沙里僉使 ) 로 승진 , 이어 절충장군 ( 折衝將軍 ) 으로 만포첨사 ( 滿浦僉使 )·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 47 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
1592 년 왜구가 대거 칩입하여 오자 옥포 , 노량 , 당포 , 사량 등 전투에서 연전 연승하자 세품계를 더하여 정헌대부를 승차하고 삼도수군 통제사를 겸직하여 1598 년까지 임진왜란을 종결짓고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
1604 년 효충장의 협책 선무공신의 호를 내렸으며 덕풍부원군 ( 德豊府院君 ) 에 봉했다 .
정조대왕은 묘전에 어필로써 이제신도비을 세워 전공을 기리고 있다 .
































